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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6-13 17:41:28
  • 수정 2019-06-17 11: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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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유학시절 이희호 여사. <사진=정국진 기자>


【미디어내일N 정국진 기자】 이희호 여사의 서거를 계기로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미디어내일N은 2008년 출간된 자서전 ‘동행’과 2016년 출간된 ‘이희호 평전’을 중심으로 청년 이희호를 조명하고자 한다.


1922년생인 이희호 여사가 청년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일제강점 말기였다. 1942년 이화여전에 입학한 그는 일제의 ‘전시교육임시조치령’으로 1944년 강제 졸업하고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이 되어야만 했다. 교육받지 못한 여자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희호는 “나는 스무 살이 넘는 성인이었지만, (일제의 결정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 과정을 마쳤어요. 학업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고, 또 학교를 그만두면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훗날 회고했다. 충남 예산에서의 지도원 생활은 일종의 농촌 계몽운동 일이기도 했는데 그는 농촌 여성들의 현실을 마주하고 농촌여성교육기관을 세우는 등의 꿈을 갖게 되기도 했다.


해방일은 일제의 공권력이 여전한 때였다. 그는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광복의 소식을 알렸다. 그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행진하며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주민들에게도 일본이 패망했다고 알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기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새로운 우리 민족의 국가를 염원하면서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라는 말을 써 벽에 붙였다.


서울대 사범대 영어과에 진학한 그의 별명은 ‘다스’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씩씩한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독일어 중성 관사인 다스로 표현한 것이다. 남녀공학에 입학한 그는 남성들이 가진 남존여비 의식과 여성들의 주눅 들고 기를 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의도적으로 더욱 중성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그는 부끄러워서 남학생들 사이에 끼지도 못하는 당시 여학생들과 달리, 보통 남학생들이 하는 등사 일을 하기도 했다.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인 이희호는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남자 뒤로 빼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셔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 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어요.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요. 또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음료수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 이희호 여사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재판이 있는 날에는 피고인 가족들과 함께 보라색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사진=정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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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창시절 연극에 몰두했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유용한 정치적 선전도구인 연극은 그에게 사회적 참여 활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통학 열차 안에서 즉석 연극을 하기도 했다. 대본을 손수 쓰고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남자인 이수일 역을 맡아 ‘프로를 능가하는’ 연기를 보였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를 통해 기독교학생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대학의 학생 리더들이 뜻을 합쳐 만든 ‘면학동지회’를 결성해 활동하며 김구 선생을 만나기도 했다.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을 따랐던 그의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정신은 이때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다.


청년 이희호는 전쟁 중이던 서른살에 부산에서 김대중을 처음 만났다. 이후 마흔한 살에 결혼하기까지 그들은 서로의 꿈과 비전을 나눈 동지였다. 30대 초반에 기독 단체의 후원으로 4년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다녀오게 되는데 퍼스트레이디이자 인권투사였던 엘리너 루스벨트를 만났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그는 회고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고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회장이 됐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가부장제 아래에서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을 현실화시키고 남녀차별 요소가 있는 법 조항을 철폐하는 운동을 해나갔다. 1959년부터는 YWCA 총무를 맡아 축첩제가 여전했던 당시 ‘혼인신고를 합시다’ 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런 활동들이 모여 훗날 호주제 폐지와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정국진 기자 kukjin.jeong@usnpartn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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