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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3-26 23:56:42
  • 수정 2019-03-27 00: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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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

 -안중근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 안중근 의사 영정. <사진=YTN>



【미디어내일N 정승호 기자】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이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렸다.


추모식에는 안 의사 유족인 외손녀 황은주, 외증손자 이명철 씨 등 친족과 숭모회 임원 및 회원, 시민, 학생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안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스가와라 토시노부(菅原敏允)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 국제교류협회 회장과 가와시마 야스미(川嶋保美) 전 미야기현 의회 의원 등 20여명의 일본 인사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추모식에선 안 의장의 '평화주의'를 널리 알린 스즈키 씨를 비롯한 3명이 김황식 이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이어 정미 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했다.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했다.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해 대일 항전 활동에 나섰다.


그 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했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 조응순, 황병길 등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를 척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에 들어갔다.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던 이토을 향해 3발의 총탄을 발사해 명중시켰다. 그리고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이토는 결국 절명하고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이 진행 됐다.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다.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정승호 기자 saint@usnpartn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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