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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9-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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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갈등의 조정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이 말했던 ‘철인’이 존재한다면 주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쉽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자 철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갈등 조정’에는 숙고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오늘날 '갈등’을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조정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갈등의 조정’이 바로 민주주의 참된 가치가 아닐까요?


[내일N 기획: 갈등]은 무겁고 어두웠던 우리 사회 속 갈등을 민주주의 대화 속으로 공론화하려고 합니다. 단박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일N'은 가치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음악 좋아하세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영화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답과 마찬가지로 다들 ‘그렇다’고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어떤 음악 좋아하나요?’, ‘어떤 영화 좋아하시는지요?’로 넘어가기 위한 전 단계쯤이 되었다. 이처럼 20세기는 누구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다름 아닌 기술발전에 힘입었다. 기술발전이 더욱 진전한 21세기에도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하고 같은 답을 하고 있지만, 갈수록 무언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이 차오르기도 한다. 부풀어 오르는 기포만큼 갈등과 불신, 피해 의식이 솟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9년 5월, ‘멜론 저작권 편취 사건’이 드러났다. 최대 음원사이트 멜론이 수억 원대 저작권료를 불법 편취한 혐의로 서울동부지검 사이버수사부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멜론이 유령음반사 LS뮤직을 만들어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편취한 금액이 50억 원에 달한다는 의혹이다. 검찰은 압수수색에 들어갔으나 이후 약 3개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건은 답보상태이다.


2019년 8월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카카오의 전자상거래소비자보호법 위반 행위와 관련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2억7400만원, 과태료 1150만원 처분을 내렸다. 카카오가 음원서비스를 이용하는 멜론 고객과 카카오뮤직 고객에게 기만적 방법으로 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소리바다 역시 음악 감상 이용권 할인율을 과장 광고한 것에 대하여 시정명령과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또 ‘엠넷’에서 음원서비스를 하면서 소비자를 기만하고 할인율을 과장하여 전자상거래법을 위반한 지니뮤직, 소비자 불편을 악용하며 ‘밀크’를 운영한 삼성전자, 그리고 네이버에도 시정명령을 내리고 과태료가 부과되었다. 모두 8월 말에 집중된 일들이다.


플랫폼 경제가 화두라지만 노동자는 착취당하고 콘텐츠 생산자는 소외되고 향유자는 이용당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플랫폼 기반으로 성장한 한국 음원 시장은 불법 다운로드 시장 흡수 명목으로 가격 덤핑 기조를 유지해왔다. 수익 배분율은 기업 중심이었다. 그 결과 음악인은 희생을 강요받고, 음악은 저가라는 인식이 뿌리박혀버렸다. 한국의 플랫폼 기반 음원 산업은 기술만 앞서고 법과 제도는 후진적이었으며, 불공정 관행과 불신 풍조가 팽배하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음악산업과 관련된 각종 리포트와 분석은 대부분 산업의 장밋빛 미래에 시선을 고정한다. 현상의 복판에 있고 기술을 활용하고 산업을 구성하는 사람, 음악산업의 존재를 가능하도록 하는 장본인, 즉 창작자와 수용자는 매번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 논외의 대상이 된다.


1. “파이가 커져도 접시는 비어있다”


한국 음악 시장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위와 같다. 굳이 여러 자료를 들추지 않아도 음반은 예전보다 확연히 덜 팔린다. 음반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록물(record)이자 작품으로서 단순한 물건 이상의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음반을 포기하고 음원 단위의 활동을 요구하는 것은 시인에게 시집을 내지 말고 시 한 편 씩만 팔라는 얘기와 비슷하다. 소설처럼 앨범 전체를 유기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앨범 아티스트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해외에서는 수백만 장씩 팔리는 히트 앨범들이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유독 큰 낙차를 기록한 한국의 음반 시장은 단순히 매개체의 변화라든지 당연한 현상이라는 주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유유히 바다를 떠다니던 빙산만의 탓이 아니다. 항로를 잘못 잡았을 뿐만 아니라 허리가 끊어지고 선체마저 약화되었다. 본질적인 이유는 자멸의 길을 닦아놓은 근시안적인 투자행태와 비문화적인 커넥션에 있다. ‘뮤직비즈니스’에서 ‘뮤직’은 빠지고 ‘비즈니스’만 남은 성장은 내실과 무관했다. 쉽게, 다수의 청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가시적인 실적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면 결과는 비슷해진다. 음악애호가들은 그러한 결과물을 좋아할 수 없었고, 음악이 생명력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무너졌다. 확대로 축소를 초래한 황폐한 번식이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자 일부는 순진한 기대를 품기도 했으나, 새로운 시스템 역시 강자가 장악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편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급성장한 음원 시장의 수익이 음악 생산자 대신 이동통신사와 서비스사업자 중심으로 분배되었고, 음악의 재생산에 재투입되는 비용은 매우 적은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른바 음원 시대에 음원 수익에 강조점을 찍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한국적 상황’을 알게 된 해외 음악인들과 음악 관계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구조에선 파이의 크기와 무관하게 생산자(창작자)는 여전히 빈 접시를 들고 서 있어야 했다. 덩치가 커지고 있지만 수익의 극히 일부만이 제작자와 음악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기반이 위태로워졌다. 성장이 후퇴를 견인한 것이다.


2. 음원 문제가 음악인의 생존 문제가 된 속사정 - 음악 생태계의 위기


음반 시장 축소와 음원 시장 확대가 2000년대 초반부터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해외도 추세는 비슷하지만 정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세계 디지털 음악 시장의 유통과 수익구조 분석」(한국콘텐츠진흥원, 2013)에 따르면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디지털 음원 시장의 비중은 2011년 기준으로 15.5%(약 77억 3100만 달러)였다. 음반시장은 159억 6900만 달러로 32%를 차지했다. 그런데 한국에선 디지털 음원시장 규모가 2012년 기준으로 69.7%(음원+음반+공연시장)에 달했고, 음원시장과 음반시장만 놓고 보면 무려 94.4%(음원+음반)를 휩쓸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계속되어 2017년에는 음원시장 1조 4400억 원, 음반시장(음반 도소매업 매출액) 1600억 원으로 이어진다.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였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생산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고 소비방식은 완전히 변화하는 동안 창작자는 대비할 시간을 얻지 못했으며, 법과 제도는 창작자의 입장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 산업의 규모는 커졌어도 음악계 전반의 상황이 악화된 ‘한국적 상황’이 있다. 음악 업계와 방송 매체의 편중성이 첫 번째 축이고, 한류 등 산업 성장 슬로건만 내세우며 생산자 집단을 방치한 것이 두 번째 축이며, IT산업 육성을 위한 플랫폼 중심주의가 세 번째 축이었다. 산업편향의 트라이포트가 생산자의 희생과 음악 생태계의 훼손을 초래했다. 아직 죽지도 않은 아르고스(창작자)의 눈알들을 뽑아 공작(기업)의 깃털에 달아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플랫폼 육성과 불법 시장 흡수를 위한 음원의 저가 정책은 본의 아니게 음반 시장의 궤멸에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말았다. 음반 판매라는 기존 음악 활동의 기초방식은 무너졌음에도 새로이 형성된 음원 시장을 통한 음악인의 수입은 극히 적은 상태이며,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공연시장 역시 양극화되어 있다. 주류 가요계에서도 음원 판매는 ‘가교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비주류 음악인 대부분은 음원 수익을 말하기조차 민망해한다.


몇 개 기업이 전체 음원 시장의 과반을 점유하는 등 소수 기업의 플랫폼 독과점이 심화되고, 소수 관료에게 중요한 결정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며, 저작권 관리단체의 불투명성에 대한 비판마저 지속되고 있다. 전체 시장의 크기 문제가 아니라 생산기반의 붕괴 가능성이 문제인 것이다. 결국 음원 수익의 문제는 음악인들에게 생존과 당위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현 산업구도의 지속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산업의 합리적 체계화가 요구되는 시점에 다다랐다. 또한 현행 법률과 제도에는 완전히 변모한 음악 산업 구조와 디지털 환경 내의 이해관계를 원만히 해결하기에는 부적합하여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들이 생겨났다.



3. 논점은 무엇이었나


① 음악은 싼 물건이다?


현재 이전보다 서비스 방식과 분배율은 개선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기형적이라 할 정도로 산업구조 재편이 이루어진 데에는 덤핑 수준의 가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가 정책으로 기업육성과 불법 시장 흡수는 사실상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작권보호센터의 2006년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 불법 음원시장의 규모는 합법 시장의 10% 이하로 축소되었다. 당시 출판 분야에선 불법 시장이 합법 시장의 절반 정도에 달했고, 영상 분야에선 아예 불법 시장 규모가 합법 시장보다 2배나 컸다. 즉, 음원 시장의 정상화 혹은 음원가격의 책정에서 늘 위험요인으로 제시되는 ‘불법 시장의 확대’는 여타 분야와는 사정이 다르다. 음원의 비정상 가격에 대해선 흥미로운 반 대논리가 등장하기도 했다.


음악은 공공재이기 때문에 저가를 유지해야 하고 정부가 가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음악이 공공재라는 앞의 항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뒤의 항에는 (현재로선) 동의하기 어렵다. 공공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다. 수용자를 위한 공공전달체계이다. 갖춰져 있는가? 갖추려는 계획이 있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시장의 저가 기조에 의지하겠다는 것은 현황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또, 생산자를 위한 공적지원체계이다. 갖춰져 있는가? 충분한 계획이 있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음악(예술)인의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파괴 논리일 뿐이다.


음악 저가정책은 음반 시장의 몰락과 음악 가치 저평가로 이어졌다. 진짜 문제는 그 음악의 생산자 역시 귀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가격만 올리자는 것이 아니다. 저작자에게 이익을 집중시키자는 것도 아니다. 생산자의 권리 주장은 음악 등 예술의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창작자들에게 어떠한 생존기반도 마련돼 있지 않은 현실을 인정하고, 유통시장에서 적절한 분배구조를 찾고, 대기업 중심 지배구조를 개선하자는 호소이다. 대기업의 음원 시장 독과점 해소와 사업자 중심 정책에서 생산자․향유자 중심으로의 전환, 그리고 결정 과정의 합리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저작권법에 대한 논의도 그 한 부분이다. 정말 음악을 공공재로 인식한다면, 그에 걸맞은 공공의 정책과 제도부터 마련해야 한다.


② 창작자와 향유자 그리고 저작권공유는 충돌하는가?


저작권법 하면, 조항이 많고 지시하는 대상과 문제가 다름에도, ‘권리자 이익 증대’만 생각하거나 ‘이용자 통제 강화’로 연결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그 자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정확한 내용 파악 없이 지나치게 지엽적으로 이해하거나 광의의 이념으로 미리 태도를 정해놓고 대하기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저작권자 권리 강화 = 향유자 제약 = 문화 자본 옹호’라는 황망한 등식을 만들면 오해의 골을 더욱 깊이 파내려가면서 불통의 장막을 열심히 깁는 셈이다. 실은 ‘저작권자≠저작권관리단체’ '창작자 권리≠이익 극대화’의 부등식을 전제로 소수 독과점기업과 소수 관료 그리고 일부 단체에 집중된 권한을 창작(노동)자와 이용자에게 분산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오해에는 배경이 있다.


첫째, 음악(인) 현실에 대한 몰이해이다. “전업 창작자가 중심이었던 것과 달라진 환경”을 말하기도 한다. 당장의 생존을 생각해야 하는 음악인들에게는 무책임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발언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당신이 선택한 직장에선 급여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 퇴근 후 남는 시간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던가 해서 돈을 벌면 된다. 당신이 선택한 일이다.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하고픈 일을 직장에서 일하는 만큼 할 수 있지 않은가?” 전업으로 음악활동을 하지 않는 음악인들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부업을 하는 현실이다. 절박한 생존 문제에 대한 이해와 현실 개혁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토록 원치 않던 자본의 문화장악으로 귀결시키는 장치에 나사를 끼우는 일을 하게 된다. 과연 생존자는 누구겠는가? 예술노동에 대한 인식 부재는 예술노동과 창작물을 여가생활이나 그 결과 정도로 보고 수많은 예술노동자가 싸워야 할 편견의 벽에 벽돌을 보태고 있다.


둘째, 디지털 환경에 대한 환상이다. 비합법 공유 플랫폼을 통하여 전 세계의 다양한 비주류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극소수에게만 해당한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되었다. 또 싸이나 방탄소년단의 유튜브 활용의 경우를 들어 음악 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 역시 특수사례의 일반화이다. 물론 합법 시장에서도 비주류 음악은 계속 비주류이다. 즉, 음악 생태계 전반의 문제이지 저작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굳이 긍정적인 환상을 부추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무관하기 때문이다. “통제를 벗어나 적극적인 창작자가 출현”하리란 기대 역시 제한적이다. 지팡이를 짚은 선지자가 외친다. “사막으로 가라, 누군가는 오아시스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면 ‘저작권 공유운동’을 지지한다. 전제가 필요하며, 사안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대안을 함께 만들어나가길 기대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비자 주의와 어깨를 걸 수도 있다. 음원 저작권에 대한 음악인들의 행동에 반감을 표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러한 소비자 주의를 체화한 것처럼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다. 마치 지하철 파업에 반대하는 시민이나 편리한 대형마트 확장에 찬성하는 소비자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작권은 이상과 이해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개념이자 현실이다. 오해받기에 십상이라 말할 때에 신중하게 되고, 위와 같이 부연설명을 더 해야 한다. 다종다양한 특수현황을 한꺼번에 묶어 사유하는 대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구분해야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리고 빈틈에 지금까지 논외였던 새로운 역할을 공공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저작물의 공유와 이용자의 참여와 생산자의 생존을 조화시켜 현실화하기 위한 공공 전달체계의 수립이다.



4. 갈등 해법의 원칙과 방향


원칙을 세워야 한다. ‘투명성’과 ‘신뢰도’ 그리고 ‘공공성’이다.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기본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이다.


(1) ‘정액제냐 종량제냐’처럼 어떤 서비스 방식인가, 수익의 몇 퍼센트인가, 얼마의 가격이 적정한가에 앞서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로 전환하는 것이다. 개인, 기관, 단체, 기업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 그래야 투명성과 신뢰도를 확보한다. 관련 당사자들이 함께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상설 심의위원회 혹은 협의기구가 필요하다. 정부의 개입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장(場)’을 마련하는 정부의 역할이야말로 중요하다. 저작권법과 음악산업진흥법의 개정 방향은 저작권자의 배타적 권리 강화가 아니라 과정의 합리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정보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구를 세우며, 독과점 방지 장치를 마련해야하기 때문이다.


(2) 저작권위탁관리단체의 투명화를 통하여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창작자와 저작권위탁관리단체의 관계는 대의에는 합의하나 이해는 분리되어 있다. 의사결정 구조의 개혁도 필요하다. 2013년부터 음악저작권 복수신탁이 공식화되었다. 간단히 말해 음악저작권협회의 독주체제가 끝날 수 있다. 이것은 선의로 추진된 것도 아니고, 창작자에게 유불리가 분명하지도 않다. 업계의 구조조정이고 힘의 표출이다. 중요한 장치는 “통합전산망에 의한 저작물사용 DB 체계화와 저작물의 공공 관리”(뮤지션 유니온)이다.


(3) 업계의 과점과 유통의 과대 이익 제한 장치 마련이다. 현재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시장 질서에 절대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가 있다. 공정한 시장의 형성을 위해서도 방지책을 세워야 한다. 플랫폼 독점 해소를 위한 법적 장치, 이를테면 1개의 서비스 업체가 음원 시장 규모의 33%를 초과할 수 없다는 시장점유 제한이다. 그리고 채널 다변화 지원이다. 공급자 권리 강화와 소비자 선택의 확대는 이러한 환경에서 가능하다.


(4) 장기적으로 저작권 자체에 대한 개념을 공유와 향유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공공 전달체계를 준비해야 한다. 공공의 개입이 필요하다. 문화예술정책은 공적 지원제도와 공공 전달체계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대개 전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음악의 경우에는 양자 모두 취약할뿐더러 후자는 아예 논외가 된다. 도서관을 통하여 출판물을 무상공급하면서 출판시장도 유지하는 시스템을 공공전달체계의 예로 들 수 있으며, 독립영화상영관 등은 공적 지원제도와 공공 전달체계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음악의 경우에는 이러한 방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의 문명화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키 눈금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둘만 든다면 하나는 사회에서 용인되고 집행되는 형벌의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인)의 지위일 것이다. 경쟁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연 선택에 의한 적자생존을 들먹이는 논리에 익숙하지만, 그건 왜곡이다. 엉뚱하게도 세렝게티 평원에 오로지 사자와 하이에나만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는 소리로 만들어버리는 짓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생태계가 아니다. 음악인이 없으면 음악도, 산업도 없다. 자,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정말로 음악을 아끼고 있는가?”




나도원 노동당 경기도당 위원장


- 음악평론가, 전 예술인소셜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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