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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8-02 18:04:46
  • 수정 2019-08-08 1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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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갈등의 조정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이 말했던 ‘철인’이 존재한다면 주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을 쉽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자 철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갈등 조정’에는 숙고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과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깨닫는 데 필요한 시간입니다.


오늘날 '갈등’을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판가름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조정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갈등의 조정’이 바로 민주주의 참된 가치가 아닐까요?


[내일N 기획: 갈등]은 무겁고 어두웠던 우리 사회 속 갈등을 민주주의 대화 속으로 공론화하려고 합니다. 단박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일N'은 가치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여정을 시작합니다.


약자와 약자의 싸움, 모함, 범죄 그리고 살인. 영화 <기생충>의 장면이다. 지하 계단 아래서 뒤엉켜 싸우는 두 가족을 보며 병원 안에서 경험했던 갈등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간호사와 간호사, 간호사와 전공의, 간호사와 타 보건의료 노동자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폭언, 의료법 위반 그리고 간호사들의 죽음까지. 개인의 비극과 인성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간호사가 병원의 잔혹한 운영 속에 고통받아왔다.


2019년 서울의료원 서지윤 간호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간호사, 2018년 서울아산병원 박선욱 간호사, 국립중앙의료원 간호사, 2016년 전남대 병원 수술실 간호사, 2015년 순천향대병원 간호사. 그리고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많은 희생이 있었다.


무엇이 간호사들에게 상처를 주고 죽음까지 택하게 했을까? 많은 간호사가 ‘간호사를 연료로 태우는 병원 시스템’을 문제로 지목했다. 간호사 한 명당 평균 16.3명의 환자 수, 과도한 업무량, 신규간호사 교육시스템의 미비, 극심한 인력난, 직장 내 폭언․폭행에 대한 병원의 은폐.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가 간호사 사망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병원 내 갈등을 조명해보려 한다.


의료법을 위반하는 간호사들


병원 안에서 수많은 폭언과 업무 전가가 간호사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병원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간호사는 최하위의 자리에 놓이기 때문이다.


보건의료노조의 보건의료 노동자 실태조사(2019)에 따르면 폭언 피해를 경험한 간호사는 79%였다. 보건의료 노동자를 향한 폭언의 주된 가해자 중 의사가 32.1%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식 의사가 되기 위한 전공의 수련 시간이 법적으로는 주당 80시간으로 제한돼 있지만, 지금도 전공의(Resident)는 주당 100시간 이상 일하고 불법을 피하기 위한 가짜 당직표도 난무한다. 전공의들은 만성적인 업무 과다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 칼끝은 쉽게 간호사를 향한다. 급할 때 연락해도 전화를 받지 않거나 심지어 폭언, 욕설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업무 중 일부분을 간호사에게 전가한다. 대리처방, 인턴업무, 대리 서명, 동의서 작성 등이 그것이다. 의사와 통화 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이게 전화로 노티할 일이에요?” “지금 시각에 노티를 해야겠어요?” “비밀번호 알려줄 테니까 처방해주세요” 등등.


2017년 순천향대 천안병원,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2019년 경기도 안성병원이 간호사의 대리처방으로 논란 한가운데 선 적이 있다. 그러나 보도 이후에도 의사 ID로 이루어지는 대리 처방은 계속되고 있다. 병원은 대리처방 근절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급박한 상황에서 의사가 처방이나 업무를 신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간호사는 환자․보호자에게 타고, 다음번 당직 의사에게 태워지고 또 다음번 업무를 인계해줄 간호사에게도 타야 한다. 그래서 결국 의료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의사의 업무를 하게 된다.


의사 인력 부족으로 전공의뿐만 아니라 간호사, 환자까지 심각하게 고통받는 것이다. 하지만 진료 기피, 의대 정원 확대, 종합병원의 전문의 고용 증원, 전공의 부족현상 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조금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이 갈등의 책임은 의사와 간호사에게만 있을까?


의사의 업무뿐만이 아니다. 약사의 조제 업무, 이송 요원의 역할, 행정직원의 업무, 임상병리사의 채혈업무까지 빈번하게 간호사에게 전가 된다. 병원이 인건비 절약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동안 병원 내 약자들 간의 갈등은 계속됐고 간호사들은 자신의 업무 이외의 것들까지 떠맡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출근이 두려운 간호사들


신규간호사 시절 출근이 너무나 두려웠다. 급작스럽게 닥치는 업무들을 어떻게 감당할지, 인계는 무사히 할 수 있을지, 주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꿈에서도 인퓨전 펌프(수액 주입장치) 알림 소리가 들린다.” “출근에 대한 공포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태움으로 인해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 “출근길에 차라리 차에 치여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증언을 동료들에게 흔하게 들었다. 2017년 국정감사에서 간호사 조기출근에 대한 초과근로수당 미지급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의료연대의 간호사 초과노동실태조사(2017)에 따르면 대학병원 간호사 1인당 초과 노동 시간은 6.9시간이었다. 조기출근과 연장 노동 이유는 ‘업무가 많아 근무시간에 다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60%)이라는 응답과 ‘인수인계 시간에 환자가 몰려오기 때문’(57.6%) 등의 대답이 많았다. 서울아산병원 박선욱 간호사가 사망했던 2018년 2월, 고인이 출근한 8일간의 초과근무 시간이 무려 45시간을 넘었다고 한다.


현재 병원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은 얼마나 진행되고 있을까? 보건의료노조의 근무시간과 공짜노동 실태조사 결과(2019)에 따르면 시간외근무 시간을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장치는 28곳(63.63%)이 아예 없었고, 있다고 응답한 병원 현황은 컴퓨터 로그인-로그아웃(2곳), 지문인식기(5곳), 직원 카드(4곳) 등이었다. 여전히 간호사들은 초과 근무에 녹초가 되고 있으며, 개선책을 마련한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공짜 노동이 만연하고 신규간호사, 경력간호사 모두를 소진 시키는 잔혹한 환경에서 생긴 갈등을 간호사 개인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시스템이 마련된 곳의 사정도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K 대학교병원은 컴퓨터 로그인-로그아웃 시간이 기록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간호사는 구두 인계 시간 전에는 OCS(처방 전달시스템)에 로그인할 수 없다. 이 병원의 수백 명의 간호사가 인계 시간 전 다른 간호사 아이디로 환자를 파악하고 물품을 카운트하며 공짜 노동을 한다. 로그인해 전산을 볼 수 없으니 환자에 대해 충분히 파악할 수 없고 실수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신규 간호사들은 환자에게, 선배에게 더 타게 된다. 초과 근무 시 사유를 작성하고 수간호사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데 이조차 쉽지 않다. 신규 간호사들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부서장으로부터 퇴근을 강요받는다. 경력 간호사들은 신규들이 못한 업무 뒤처리를 하느라 진땀 흘린다.


비상식적인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로그인만 차단되니 간호사간 갈등은 깊어져 간다. 물론 초과 근무 시 OCS 차단 시스템 도입으로 오버타임이 감소한 부분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현장의 불만에 귀 기울이려는 병원의 노력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노사협의회에 안건으로 올라갔으나 “간호부에 물어봤지만 아무런 불만이 없다.” “인계 시간 전 OCS 로그인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라는 것이 경영진의 일관된 답이다. 신규 간호사들은 출근이 두렵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소통이 없는 노동환경에서 미숙한 업무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항상 힘없는 간호사에게만 향해지기 때문이다.


갈등 예방을 위한 법


이수진 이화여대 교수는 작년 한 토론회에서 한국의 신규간호사 교육은 평균 57.3일로 두 달에 못 미친다고 말했다. 프리셉터 간호사 또한 과중한 업무로 가르쳐줄 여유가 없음으로 신규간호사는 제대로 업무습득을 못 하고 잡다한 보조업무만 하며 교육 기간을 보내게 된다. 업무에 미숙한 상태에서 억지로 독립하기 때문에 타 간호사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주게 되고 갈등이 생긴다.


일본에서도 2008년 두 명의 신규간호사 사망 사건이 있었다. 이후 ‘간호사 등의 인재확보 촉진에 관한 법’을 근거로 신입 간호사 교육을 의무화했다. 국가 지원 예산을 활용해 신규 간호사 연수 가이드라인 개발을 하였고 신규 간호사 지도체계 구축을 하였다. 그 결과 신규 간호사 의료사고 발생률이 9.8%에서 7.8%로 감소, 이직률은 9.2%에서 7.9%로 감소했다. 미국의 경우 1년간의 간호사 레지던시 프로그램(NRP․Nurse Residency Program)을 마련했고 호주 역시 1년간의 신규 간호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현재 내․외과 병동의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 수는 미국의 경우 4~5명, 일본 7명, 영국은 8.6명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적게는 15명에서 많게는 20명 이상까지도 담당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1:5의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을 법에 명시했다. 이미 세계 80여 개 국가에서 간호단독법이 제정되었다.


올해 국내에서도 간호 단독법 제정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김세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간호법안’과 김상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간호․조산법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의사단체의 엄청난 반발을 받았고 간호사들에게조차 많은 비난을 받고 계류 중이다. 의사협회는 기존 의료법상 ‘진료의 보조’로 정해져 있는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간호단독법이 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업무’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반대했다.


간호사들이 반대한 이유는 실효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법안의 오류 때문이다. 현행 의료법상 간호조무사는 간호사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의료법 제80조의2). 또한, 간호사는 간호조무사가 수행하는 ‘업무 보조’에 대한 지도를 할 수 있다(의료법 제2조 제2항 제5호 라목). 그러나 간호․조산법에 의하면 간호사는 간호조무사가 수행하는 제1호부터 제3호까지의 ‘업무’에 대한 지도를 한다(간호조산법 제15조 4호)고 되어 있다. 업무보조라는 단어가 업무라는 단어로 탈바꿈된 것이다. 간호단독법이 간호조무사에게 간호사의 업무를 시행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간호사들의 입장이다.


간호․조산법안에는 간호사의 표준 보수지급 기준마련, 간호인력지원센터 지원에 관한 법적 근거 마련, 간호사 양성 및 처우개선을 위한 종합계획의 수립 등 간호사 처우개선을 위한 질 높은 내용도 담겨 있다. 그런데도 부적절한 일부 조항과 간호협회의 홍보 부족으로 지지를 얻지 못했고, 간호사 단독법안 마련을 위한 오랜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법안들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간호사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인력 문제, 교육 문제의 해결책이 포함된 간호법안 마련이 절실한 실정이다.


간호사들의 잇따른 죽음에 대해 언론은 태움 문제만을 조명하는 경우가 많다. 여론 역시 간호계의 조직문화에 관해서만 갑론을박한다. 의료현장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을 여초집단의 갑질 문화, 선임 간호사의 인성 문제로만 진단한다면 간호사들의 고통은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시행만으로는 말초적인 해법밖에 될 수 없다. 환자를 살리기 위하여 간호사가 된 누군가가 범법자나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 혹은 간접적인 살인자가 되기까지 원인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여타 선진국의 사례처럼 실질적으로 간호사의 업무환경을 개선하고 보건의료 노동자 간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김연수 간호사


- 더불어민주당 청년을지로분과 간호사근무환경개선특소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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