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내일N 김남미 기자】올해 스물이 된 청년들이 태어난 1999년. 그 해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39년 전 광주에서 목이 터져라 “석방하라” 외쳤던 바로 그 김대중이다. 태어나고 보니 이미 민주주의라 그 사실이 대수롭지 않았던 세대. 지나간 39년은 현재의 20대가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세월이다. 200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청년들은 1980년 광주의 오월과 어떤 매개를 통해 마주할 수 있을까.
GO BACK, 1980년 5월
송원여상 3학년 박현숙.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 떠나간 사람 뒤에는 떠나보낸 사람들이 있다. 28일 전남도청에서 숨진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 씨의 어머니는 광주를 제대로 기억하고자 찾아온 대학생들에게 “말씀 좀 잘해주시오. 우리는 그것이 제일 소원입니다”라고 당부했다.
GO BACK. 1980년 5월. 아들과의 마지막 순간을 회상하는 김길자 어르신의 목소리는 좌중을 순식간에 39년 전, 전남도청 본관 정문 앞 그 자리로 데려갔다.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와 집에 가자고 다그치는 어머니에게 열일곱 아들은 말했다. “엄마, 생각해봐. 창근이는 죽었는데 나만 살려고 하면 쓰겄어?” “그 소리를 들으니께 내 자식만 살자고 델꼬가고, 그 애기가 죽었다카니 그렇게 막 델꼬 올 수가 없었어요.” 학생이라고 손들고 나오면 (그냥 보내주니) 괜찮다고 엄마를 달래던 소년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 했다.
그렇게 부모를 집으로 돌려보낸 이가 한명 더 있다. 현옥 씨가 전하길, “현숙이는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를 못 참는 아이”였다. 소녀는 담양에서 광주까지 백리 길을 걸어 자식을 데리러 온 아빠를 돌려보내고, 도청에 남아서 일손을 보탰다. 그러던 5월 23일, 소녀는 자취방에 있던 8살 남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함께 화순으로 가는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버스는 주남마을 인근에서 11공수여단(62대대 5중대)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같이 탄 18명 중 15명이 즉사했다. ‘주남마을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이다. 현옥 씨는 동생이 “죽음을 아마 예견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발포가 있기 한 시간 전, 소녀는 주남마을을 100미터 앞두고 운전자에게 차를 돌려 달라 부탁해 집 앞에 남동생을 내려줬다. “누나 금방 다녀올테니, 집에 가있어.” 앞서 소년이 그랬듯, 소녀의 이 말 또한 이뤄지지 못 했다.
주먹밥 먹으며 우는 할아버지, 만감이 교차했다
2박 3일로 기획된 광주 역사 기행 ‘오월의 고백’ 마지막 일정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더불어민주당 대학생위원회 25인은 17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18일 망월동 묘지에서 치러진 기념식과 오월길(전남대학교에서 구 전남 도청에 이르는 코스)을 거쳐 이날 오전, 5.18 자유공원까지 둘러보고 온 참이었다.
“교과서 이상의 5.18”을 모르던 청년들이 39년 전 기억에 마음으로 접속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준 것은 ‘5.18 주간의 광주’라는 물리적 시공간이 주는 실감이었다.
“전야제 날 금남로에서 나오는(재현한) 애국가와 총소리, 정면에 보이는 옛 전남도청의 모습에 그때 그 시절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한 할아버지께서 (주최 측이 나눠주는) 주먹밥을 드시면서 우시더라.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전용기 씨의 소감이다. 18일 항쟁의 시작지가 된 전남대학교에서 참가자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싸웠겠냐?”는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 했다. 그 중 장지환 씨는 분신한 대학생의 얘기를 듣고는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다 제 나이 또래고 저보다 어리기도 한데. 솔직히 겁도 나고 해서 피했을 것 같기도 해요. 약간 울컥하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혼잣말처럼 물으며 그 과정을 헤아리고 상상하는 얼굴이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복잡해보였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작 3일 만에 광주에 켜켜이 쌓인 질곡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고 갈 순 없다. 그래서일까. 기획단은 일정 맨 끝에 5.18 유족과의 만남을 배치했다. 교과서 속 사실의 나열이 차가운 기억이라면 인간이 간직한 기억에는 온도가 있다. 고통을 겪은 당사자의 육성을 듣는 경험은 그 자체로 듣는 이를 흔든다. 말하고 듣는 일만으로도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고립된 기억이 아닌, 더 널리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내는 장이 될 수 있다.
문재학 씨의 아버지는 작년, 전국 국어 교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애기(아들)도 못 데리고 온 아빠가 뭐 하는 아빠냐, 나는 자잘한 아빠”라고 자조하자 이런 대답을 받으셨다고 한다. “자잘한 아빠가 아니라 장한 아들의 아빠다. 그런 생각 마시라. 우리가 이렇게 다 듣고 망월동도 와서 보고 갔으니, 학생들한테 잘 가르쳐서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겠다. 건강만 하시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무엇을 해야 할까. 3일간의 광주행은 이들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나. 이에 대해 두경수 씨는 “5.18은 아직도 정확히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결과가 없고, 경과가 어땠는지 비밀이다. 누가 쏘게 했는지, 전두환이 왔는지 안 왔는지, (전시권을 가진) 미국은 어디까지 승인했는지 모른다”며 조속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국가가 잘못 했을 때 국민은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며 “5.18 관련자 보상에 관한 법률은 ‘배상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월의 고백’은 과거로 돌아간다(GO BACK)는 뜻 외에도 “사회에서 바라보는 왜곡된 역사의식에 대한 진실을 배워서 이 진실을 고백해보자”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광주 출신으로 이번 기행을 준비한 양소영 단장은 3일간의 일정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기행 준비하면서 느꼈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을 잊지 않고, 5.18의 진실을 전하는 역할을 해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남미 기자 nammi215@usnpartn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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