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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5-21 10:05:35
  • 수정 2019-05-22 17: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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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내일N 김남미 기자】올해 스물이 된 청년들이 태어난 1999. 그 해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39년 전 광주에서 목이 터져라 석방하라외쳤던 바로 그 김대중이다. 태어나고 보니 이미 민주주의라 그 사실이 대수롭지 않았던 세대. 지나간 39년은 현재의 20대가 평생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긴 세월이다. 200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청년들은 1980년 광주의 오월과 어떤 매개를 통해 마주할 수 있을까.


GO BACK, 19805



▲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 의 어머니 `김길자`씨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김남미 기자>


송원여상 3학년 박현숙.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 떠나간 사람 뒤에는 떠나보낸 사람들이 있다. 28일 전남도청에서 숨진 고등학생 시민군 문재학씨의 어머니는 광주를 제대로 기억하고자 찾아온 대학생들에게 말씀 좀 잘해주시오. 우리는 그것이 제일 소원입니다라고 당부했다.


GO BACK. 19805. 아들과의 마지막 순간을 회상하는 김길자 어르신의 목소리는 좌중을 순식간에 39년 전, 전남도청 본관 정문 앞 그 자리로 데려갔다. 계엄군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와 집에 가자고 다그치는 어머니에게 열일곱 아들은 말했다. “엄마, 생각해봐. 창근이는 죽었는데 나만 살려고 하면 쓰겄어?” “그 소리를 들으니께 내 자식만 살자고 델꼬가고, 그 애기가 죽었다카니 그렇게 막 델꼬 올 수가 없었어요.” 학생이라고 손들고 나오면 (그냥 보내주니) 괜찮다고 엄마를 달래던 소년은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 했다.



▲ 문현옥 씨가 `오월` 기행 대학생들에게 동생 `문현숙` 씨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김남미 기자>


그렇게 부모를 집으로 돌려보낸 이가 한명 더 있다. 현옥 씨가 전하길, “현숙이는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를 못 참는 아이였다. 소녀는 담양에서 광주까지 백리 길을 걸어 자식을 데리러 온 아빠를 돌려보내고, 도청에 남아서 일손을 보탰다. 그러던 523, 소녀는 자취방에 있던 8살 남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함께 화순으로 가는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버스는 주남마을 인근에서 11공수여단(62대대 5중대)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같이 탄 18명 중 15명이 즉사했다. ‘주남마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다. 현옥 씨는 동생이 죽음을 아마 예견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발포가 있기 한 시간 전, 소녀는 주남마을을 100미터 앞두고 운전자에게 차를 돌려 달라 부탁해 집 앞에 남동생을 내려줬다. “누나 금방 다녀올테니, 집에 가있어.” 앞서 소년이 그랬듯, 소녀의 이 말 또한 이뤄지지 못 했다.


주먹밥 먹으며 우는 할아버지, 만감이 교차했다


▲ 91년 분신정국 12열사 합동 분향소에서 참가자 김예니 씨가 방명록을 적고 있다. <사진: 김남미 기자>


2박 3일로 기획된 광주 역사 기행 ‘오월의 고백마지막 일정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더불어민주당 대학생위원회 25인은 17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18일 망월동 묘지에서 치러진 기념식과 오월길(전남대학교에서 구 전남 도청에 이르는 코스)을 거쳐 이날 오전, 5.18 자유공원까지 둘러보고 온 참이었다.


교과서 이상의 5.18”을 모르던 청년들이 39년 전 기억에 마음으로 접속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준 것은 ‘5.18 주간의 광주라는 물리적 시공간이 주는 실감이었다.


전야제 날 금남로에서 나오는(재현한) 애국가와 총소리, 정면에 보이는 옛 전남도청의 모습에 그때 그 시절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한 할아버지께서 (주최 측이 나눠주는) 주먹밥을 드시면서 우시더라.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전용기 씨의 소감이다. 18일 항쟁의 시작지가 된 전남대학교에서 참가자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싸웠겠냐?”는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 했다. 그 중 장지환 씨는 분신한 대학생의 얘기를 듣고는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다 제 나이 또래고 저보다 어리기도 한데. 솔직히 겁도 나고 해서 피했을 것 같기도 해요. 약간 울컥하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혼잣말처럼 물으며 그 과정을 헤아리고 상상하는 얼굴이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복잡해보였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김길자, 박현옥 두 분의 증언을 듣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대학생위원회의 모습. <사진: 김남미 기자>


고작 3일 만에 광주에 켜켜이 쌓인 질곡의 시간을 온전히 느끼고 갈 순 없다. 그래서일까. 기획단은 일정 맨 끝에 5.18 유족과의 만남을 배치했다. 교과서 속 사실의 나열이 차가운 기억이라면 인간이 간직한 기억에는 온도가 있다. 고통을 겪은 당사자의 육성을 듣는 경험은 그 자체로 듣는 이를 흔든다. 말하고 듣는 일만으로도 사람들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고립된 기억이 아닌, 더 널리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내는 장이 될 수 있다.


문재학 씨의 아버지는 작년, 전국 국어 교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애기(아들)도 못 데리고 온 아빠가 뭐 하는 아빠냐, 나는 자잘한 아빠라고 자조하자 이런 대답을 받으셨다고 한다. “자잘한 아빠가 아니라 장한 아들의 아빠다. 그런 생각 마시라. 우리가 이렇게 다 듣고 망월동도 와서 보고 갔으니, 학생들한테 잘 가르쳐서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겠다. 건강만 하시라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무엇을 해야 할까. 3일간의 광주행은 이들에게 어떤 과제를 남겼나. 이에 대해 두경수 씨는 “5.18은 아직도 정확히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결과가 없고, 경과가 어땠는지 비밀이다. 누가 쏘게 했는지, 전두환이 왔는지 안 왔는지, (전시권을 가진) 미국은 어디까지 승인했는지 모른다며 조속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국가가 잘못 했을 때 국민은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5.18 관련자 보상에 관한 법률은 배상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월의 고백은 과거로 돌아간다(GO BACK)는 뜻 외에도 사회에서 바라보는 왜곡된 역사의식에 대한 진실을 배워서 이 진실을 고백해보자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광주 출신으로 이번 기행을 준비한 양소영 단장은 3일간의 일정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기행 준비하면서 느꼈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을 잊지 않고, 5.18의 진실을 전하는 역할을 해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남미 기자 nammi215@usnpartn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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